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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이 다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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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모이 다쓰오는 1844년 요네자와번에서 태어난 하급 무사로, 양명학을 공부하고 실학을 배우며 경세제민의 뜻을 품었다. 막부 말기에는 요네자와 번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의 공사로 활동했다. 사쓰마번을 비판하다가 투옥되어 1871년 참수형을 당했다. 그의 시신은 해부 수업에 사용되었고, 그의 이름은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다. 그의 일화와 작품은 후대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소설과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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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이 다쓰오
기본 정보
씨명구모이 다쓰오
고기 후지타로 『구모이 다쓰오와 샤쿠다이슌』(1930)에서 구모이 다쓰오
고기 후지타로 『구모이 다쓰오와 샤쿠다이슌』(1930)에서 구모이 다쓰오
시대에도 시대 말기 ( 막말 ) - 메이지 시대 초기
출생덴포 15년 3월 25일 (1844년5월 12일)
사망메이지 3년 12월 28일 (1871년2월 17일)
개명어릴 적 이름: 효키치, 이노키치, 곤로쿠, 구마조
다른 이름본명: 고지마 모리요시, 자: 교테이, 호: 마쿠라즈키 또는 고카이쿄토
시호(알 수 없음)
계명기유인 겟신 조에이 거사
묘소요네자와시 조안지
관위(알 수 없음)
막부에도 막부
주군(알 수 없음)
(알 수 없음)
씨족(알 수 없음)
부모아버지: 나카지마 소에몬, 어머니: 야시로가 쓰구의 둘째 딸 야오
양아버지: 고지마 사이스케 (숙부)
형제(알 수 없음)
배우자마루야마 쇼자에몬의 둘째 딸 요시
자녀(알 수 없음)
특기 사항(알 수 없음)

2. 생애

구모이 다쓰오는 1844년 5월 12일 요네자와번의 하급 무사 나카시마 소우에몬과 야시로 가문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효키치, 이노키치, 곤로쿠, 구마조 등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장난기 넘치는 성격이었지만, 학문에 대한 열정 또한 남달랐다. 8세에 우에이즈미 세이지로의 사숙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맹상군에 비견될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았다. 9세에 스승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야마다 가쿠도의 사숙으로 옮겨 공부했고, 12세에는 소네 도시토미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14세에는 번교 흥양관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포상을 받고 효자상도 받았다. 흥양관 도서관의 장서 3천 권 대부분을 읽었으며, 주자학을 비판하고 양명학을 공부했다. 18세에 숙부 고지마 자이스케의 양자가 되어 마루야마 쇼자에몬의 차녀 요시와 결혼했다. 숙부가 사망하자 21세에 다카하타의 경비를 이어받았다.

2. 1. 막부 말기 활동

1865년 에도 유학 중 야스이 소켄(安井息軒)의 문하에서 실학(實學)을 배우며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뜻을 품었다. 당시 소켄의 문하생으로는 기도 다카요시, 히로사와 사네오미, 시나가와 야지로 등이 있었다. 1866년 요네자와번으로 돌아와 번정에 참여하려 했으나, 보수적인 분위기 때문에 좌절되었다. 그러나 에도 막부조슈 정벌 실패와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쇼군 취임 등으로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자, 요네자와 번은 우에스기 모치노리를 소환하고 센자카 다카마사를 교토에 파견했으며, 구모이 다쓰오도 동행하게 되었다.

1867년 대정봉환(大政奉還) 이후 신정부의 공사(貢士)로 임명되어 정치에 참여했다. 1868년 보신 전쟁(戊辰戰爭) 당시 사쓰마번을 비판하는 격문을 기초하고 오우에쓰 열번동맹(奥羽越列藩同盟) 결성을 촉구했으나, 동맹이 패배하면서 근신 처분을 받았다.[1]

2. 2. 메이지 시대와 죽음

1869년 근신이 해제된 후 신정부 집의원 의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사쓰마번을 비판하다가 한 달 만에 사임했다. 1870년 보신 전쟁 패잔병들을 구제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다가 정부 전복 음모 혐의로 체포되었다. 1871년 제대로 된 조사나 재판도 없이 참수형을 당하고 효수되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의 시신은 해부학 실습에 사용되었으며, 신정부는 그의 이름과 행적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했다. 동지 13명이 참수되었고, 22명이 옥사했다.

3. 사상

구모이 다쓰오는 주자학을 비판하고 양명학을 신봉했으며,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며 실천을 통해 세상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국공법을 연구하여 국제 정세에 밝았으며, 존왕양이 사상을 바탕으로 일본의 자주독립을 옹호했다. 신분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주장했으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강조했다. 야스이 소켄의 삼계숙(三計塾)에서 공부하며 경국제민(經國濟民)의 실학에 뜻을 두었다.[1]

4. 평가

구모이 다쓰오는 불의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보신 전쟁에서 몰락한 후, 구 막부 측 번사들을 모아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정부 전복 음모로 간주되어 1871년 고덴마초 감옥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향년 27세. 그의 시신은 해부 수업에 사용되었고, 고향인 요네자와에서는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이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다.

4. 1. 재평가

메이지 시대에는 역적으로 몰려 잊혔으나, 자유민권운동가들에 의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그의 한시는 민권운동가들에게 애송되었으며, 그의 사상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니시다 기타로, 고토쿠 슈스이 등 일본의 지식인들도 그의 정신을 기렸다.

4. 2. 한국과의 관계

구모이 다쓰오는 1870년 정부 전복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871년 고덴마초 감옥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억울한 죽음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깊은 공감과 연대 의식을 불러일으켰다.[1] 그의 절명시(絶命詩)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으며, 그의 삶은 조국 독립을 위한 투쟁의 귀감으로 여겨졌다.[1]

5. 일화

구모이 다쓰오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남겼다.


  • 공부에 열중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공부 방망이' 일화
  • 스승의 심부름값을 다른 곳에 썼지만 오히려 칭찬받은 '만국공법' 일화[2]
  • 맑은 정신으로 글을 쓰고자 했던 '청수(淸水)의 마음' 일화[3]


자유 민권 운동 지사들은 그의 한시를 애독했다. 니시다 기타로는 그의 묘를 방문하여 감명을 받았다고 했으며,[4] 고토쿠 슈스이는 억울하게 죽은 선배 중 하나로 다쓰오를 언급했다.[5]

후지사와 슈헤이는 다쓰오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구름이 달린다(雲奔る)』를 썼다.

5. 1. 공부 방망이

유우도에 입학한 구모이 다쓰오는 어느 날, 학우인 사토 시로(佐藤志郎)의 방문을 받았다. 사토가 공부방에 들어서자, 1척 정도의 막대기가 있었다.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다쓰오는 "이것은 공부 방망이라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이유를 사토가 묻자 "내 머리의 을 보게. 밤에 공부하다가 졸리면, 이것으로 머리를 때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물로 얼굴을 씻었지만 안 되어서, 박하를 눈꺼풀에 붙여봤다. 그랬더니 눈이 따끔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고추를 핥아보니 매워서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이 막대기로 때리는 것이 가장 좋다. 이전에 춘추좌씨전을 읽을 때도 이것으로 때리면서 읽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5. 2. 만국공법

야스이 소켄의 심부름으로 담요를 사러 요코하마의 상관에 갔지만, 그 돈으로 만국공법을 사 왔다.[2] 그러나 스승은 오히려 그를 칭찬했다.[2]

5. 3. 청수(淸水)의 마음

네 번에 걸친 탄원서가 좌절되고 근신 처분을 받은 다쓰오는 근신 중 친구인 가와무라 도쿠우(河村徳友)의 집에서 글을 썼다. 글을 쓸 때마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 정원의 물을 떠왔다고 한다. 친구의 증조할머니가 2층의 물을 쓰면 어떻겠냐고 묻자, 다쓰오는 "붓과 먹은 깨끗한 마음으로 휘둘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깨끗한 물이어야 한다"라고 말했다.[3]

6. 작품

구모이 다쓰오는 격문 "토벌의 격문(討薩檄)"과 한시 "술회"(절명시), "백매편(白梅篇)"[1], "북하도상(北下道上)"[2] 등을 남겼다. 그의 한시는 메이지 초기에 널리 읽혔으며, 특히 자유 민권 운동 지사들에게 사랑받았다.[4] 고토쿠 슈스이는 사형을 앞두고 요시다 쇼인, 구모이 다쓰오 등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언급했다.

다쓰오의 절명시 술회는 다음과 같다.

: 죽으면서 죽음을 두려워않고

: 살아서 삶을 훔치지 않으리

: 죽음을 각오한 남아의 절개

: 태양과 싸우노라

: 남아가 가는 길의 올곧음은

: 솥에 삶긴다해도 두려워않으리

: 비록 작은 이 한몸일지라도

: 만리장성이노라

7. 대중문화

후지사와 슈헤이의 소설 『구름이 달려가다(雲奔る)』 (분슌 문고, 1982년)에서 구모이 다쓰오를 다루고 있다.[1]

NHK 대하드라마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2]


  • 1980년 사자의 시대(각본: 야마다 타이치, 배우: 카자마 모리오)
  • 1990년 나는 새처럼(배우: 이시이 켄이치)

참조

[1] 웹사이트 https://elkoravolo.h[...]
[2] 웹사이트 https://elkoravolo.h[...]
[3] 웹사이트 https://elkoravolo.h[...]
[4] 웹사이트 https://elkoravolo.h[...]
[5] 웹사이트 https://elkoravol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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